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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1048 ~ 1118)
-능력치-
지휘력 8
기사도 0
권위 2
신앙심 3
-수행원-
타티시우스 : 제국의 뛰어난 해군 및 야전 사령관 중 하나로 웅변 및 연극에도 뛰어납니다. (통솔+2)
-특성-
국가의 지도자 : 이 남자는 하나뿐인 이 세계의 강한 지배자이며, 통치를 할 때 존경과 그에 따른 복종을 동시에 받는다. (지휘력 +1, 권위 +2, 개인 안전 +3)
강력한 지휘관 : 이 남자는 확실한 전투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군인들을 잘 통솔하는 능력이 있다.(지휘력 +2)
지휘의 재능 : 군 전술에 관하여 언제나 타고난 이해력을 보였다. (지휘력 +1)
유망한 방어자 : 그는 적의 공격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방어시 지휘력 +1)
지성 :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거나 배울 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지휘력 +2, 무역이익 +5%, 세금이익 +5%)
밤의 투사 : 어둠속에서 군대가 우왕좌왕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거대한 군대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지휘하는 방법을 익혔다. (야간전투시 지휘력 +1)
알렉시우스는 소년 시절부터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에 참여해 명성을 쌓은 장군으로, 키가 작고 수염이 덮수룩했으며 외모는 상당히 볼품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군대 통솔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불패에 가까운 전적을 쌓았으며, 그 덕에 비잔티움의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1081년 무능한 황제였던 니케포루스 보타네이아테스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황제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비잔티움 콤네누스 왕조의 시초가 된다.
알렉시우스는 능력이 뛰어나고 인기가 높아, 비잔티움의 시민들은 그가 바실리우스 2세 이후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가 제위에 오를 때의 비잔티움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의 대패로 비잔티움의 정규군은 궤멸 상태였고, 비옥한 소아시아 지방을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앗겨 재정상황도 최악에 가까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칠리아, 셀주크 투르크, 페체네그족, 십자군 같은 외부의 적들이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알렉시우스에게 닥친 첫번째 시련은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로, 뛰어난 전사이자 장군이었던 아풀리아 공작 로베르트 기스카르와 그 아들 보에몽의 침략이었다. 알렉시우스는 정규군과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로 열심히 항전했으나, 두라초 전투에서 패배하고 밀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알렉시우스는 정면 대결로 승산이 없자 외교술을 발휘해 베네치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아풀리아의 불만세력에게 자금을 제공해 반란을 일으켜 기스카르를 회군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홀로 남은 보에몽은 알렉시우스의 유인 전술에 걸려 패주하였고, 이후 기스카르가 본토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비잔티움 원정에 나설때 장티푸스로 사망하게 되면서 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두번째 시련은 비잔티움에게 언제나 골칫거리였던 북쪽의 페체네그족의 침략이었다. 페체네그족은 투르크계 유목민족으로, 용맹하고 잔인하며 배신을 밥먹듯이 하여 제국에 인접한 이민족 중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부족이었다.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비잔티움은 매년 상당량의 금을 제공하였는데, 알렉시우스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쿠만(스키타이)족과 연합하여 페체네그족을 포위망에 몰아넣어 일망타진하였다. 덕분에, 제국에게 최고로 골치아픈 이민족이었던 페체네그족은 거의 궤멸되었고 소수의 생존자는 헝가리에 정착하였으며, 두번다시 제국에 해가 되지 못하였다.
세번째 시련은 유명한 1차 십자군이다. 수많은 십자군들이 헝가리를 지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동했는 데, 알렉시우스의 현명한 대처가 없었더라면 4차 십자군이 도래하기 훨씬 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거나 제국이 쑥대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알렉시우스는 십자군 지도자에게 명목상이나마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어 명분을 얻었고, 십자군이 셀주크 투르크군과 싸울 수 있도록 소아시아로 수송해 주었지만 직접 투르크군과 충돌하는 것을 피해 국력을 쓸데없이 소모하지 않았다. 소아시아로 간 대부분의 십자군들은 경험부족으로 투르크군에게 대패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서유럽인들이 알렉시우스를 투르크와 내통한 배신자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후 서유럽의 문헌을 보면, 알렉시우스는 매우 비겁하고 음흉하며 우유부단한 인물로 묘사된다.)
마지막 시련은 바로 알렉시우스와 악연이 깊었던 기스카르의 아들 보에몽이었다. 보에몽은 로베르트 기스카르 사후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1차 십자군에 참전하였는데, 콘스탄티노플을 통과하면서 알렉시우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지만 안티오크를 점령하자 그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이후, 안티오크 공국을 조카에게 맡기고 프랑스로 와서 군사를 모은 뒤 비잔티움을 공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알렉시우스에게 패하여 사로잡히고 만다. 알렉시우스는 평생의 골칫거리이자 맹세를 어긴 배신자인 보에몽을 관대하게 용서하였고, 그가 다시 충성의 맹세를 하는 조건으로 석방해 주었다. (보에몽은 이후에도 비잔티움 정벌을 계획하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
이 네가지 시련 중 어느 하나라도 저지하는 것을 실패했다면 비잔티움의 역사가 알렉시우스 1세의 치세로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알렉시우스는 뛰어난 통솔력과 임기응변의 외교술로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시우스는 만년에 인기가 최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이유는 알렉시우스에게 너무나도 큰 기대감을 가졌던 비잔티움 시민들이 그의 치세 때 유스티아누스나 바실리우스 같은 전성기를 다시 누리기를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국이 안정된 상황에서 알렉시우스 같은 능력있는 황제가 즉위했더라면 비잔티움은 제3의 전성기를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은 만지케르트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지속적인 외적의 침입으로 국고는 파탄상태였다. 결국, 알렉시우스는 제국의 팽창보다는 외환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데 주력할 수 밖에 없었고, 위기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만지케르트 전투 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으로 제국을 성장시켰지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시민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IMF로 파탄난 경제를 겨우 원상태로 복구시켰는데도, 경제를 못 살렸다고 욕 먹은 대통령들과 흡사한 상황) 하지만, 그는 바실리우스 2세 이후로 가장 뛰어난 황제였으며, 비잔티움의 역사가 좀 더 오래 지속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사족이지만, 언제나 적에게 관대했던 알렉시우스 1세의 성격으로 봤을 때, 기사도가 좀 더 높은게 고증에 맞지 않나 싶습니다. 인기가 엄청 없었으므로 권위가 낮은 건 이해가 가지만...;; 그리고, 알렉시우스 개인의 신앙심도 높았다고 하던데, 신앙 관련 트레잇이 전혀 없는 것도 약간 이상한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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