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170
윌리엄 1세 (1028 ~ 1087)
-능력치-
지휘력 4
공포 4
권위 5
신앙심 5
-특성-
국가의 지도자 : 이 남자는 하나뿐인 이 세계의 강한 지배자이며, 통치를 할 때 존경과 그에 따른 복종을 동시에 받는다. (지휘력 +1, 권위 +2, 개인 안전 +3)
유망한 지휘관 : 이 남자는 적어도 전장에서의 전술론에 관해선 잘 이해하고 있다. (지휘력 +1)
지성 :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거나 배울 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지휘력 +2, 무역이익 +5%, 세금이익 +5%)
거침없는 정복 : 이 남자의 이름은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위업을 달성한 그를 완전히 숭배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름인 만투라의 긍지이다. (권위 +3, 개인안전 -2, 평판 +3)
종교적인 성품 : 그가 일을 할 때에나 개인적인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신앙 +2)
잔인성과 교활함 : 포로들의 시체를 돌려 보냄으로서 적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는 이러한 행동은 실수가 아니며, 그는 이러한 행동들을 오히려 즐긴다. (공포 +2)
잔인한 지도자 : 불복종의 이유로 매질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때리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공포 +2)
윌리엄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와 피혁업자의 딸 아를레따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다. 키가 크고 단단한 체격을 가지고 있으며,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화술은 유창했다고 한다. 윌리엄은 서자였지만 로베르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로베르가 성지순례를 가면서 노르망디 공작을 물려받았다. (이후 로베르는 성지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는다.) 윌리엄은 어린 나이에 공작위에 오른데다 서자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매우 힘든 소년기를 보냈는데, 공작위를 노리는 음모자들 때문에 후견인들과 가정교사까지 피살될 정도로 심각한 위협 속에서 성장했다. 덕분에 윌리엄은 굳센 의지력과 잔인한 성품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성격은 성장 후 반란 진압과 통치, 그리고 잉글랜드 정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와 대고모가 같았는데, 이를 빌미로 에드워드가 죽자 잉글랜드의 왕위를 요구하였다. 이는 완전한 생트집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부당했고(당시 잉글랜드는 세습제가 아닌 선출제였고, 윌리엄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순위가 매우 낮았다.) 에드워드의 처남인 헤럴드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윌리엄은 이를 빌미로 잉글랜드 원정을 계획하였는데, 말도 안되는 생트집이었지만 교황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봉건 기사의 종군기간동안 잉글랜드를 정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윌리엄은 정복지의 보상을 미끼로 많은 용병과 기사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였다.
운명도 윌리엄의 편이었는지,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상륙하기 며칠 전에 노르웨이가 북쪽에 침입하였다. 헤럴드는 급히 군대를 편성해 노르웨이군을 섬멸했지만, 그 덕에 윌리엄은 안전하게 잉글랜드에 상륙할 수 있었다. 헤럴드는 다시 군대를 남하시켜 윌리엄과 대적했지만, 군대는 지쳐있었고 노르웨이와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영주들이 연이은 전투를 거부하였다.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 헤럴드는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에게 맞서게 되었다.
헤이스팅스에서 헤럴드는 군을 언덕에 포진시키고 윌리엄을 기다렸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대부분 보병으로 이루어진 반면, 노르망디군에는 대륙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기병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북유럽에선 말을 탄 채 돌격하는 기병은 거의 없었고, 말을 타고 이동한 뒤 내려서 싸우는 기보병대가 대부분이었다.) 노르망디 궁수와 기사들이 언덕 위로 공격했지만 지형상의 이점 덕분에 번번히 격퇴당하자, 윌리엄은 유인책을 써 군대를 일부러 후퇴시켰다. 헤럴드는 곧 추격에 나섰는데, 윌리엄은 이를 충분히 유인한 뒤 기병으로 둘러 싸 포위 섬멸하였고, 이 전투에서 헤럴드는 전사하였다. (윌리엄이 유인책을 쓴 게 아니라 실제로 노르만 기병들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가 운이 좋아 포위 섬멸했다는 설도 있다.)
윌리엄은 무리해서 런던을 공략하지 않고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면서 항복을 기다렸다. 견디지 못한 잉글랜드는 윌리엄에게 왕위를 주면서, 잉글랜드에서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다. 윌리엄은 유능한 통치자였는데, 색슨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종군한 기사들에게 영토를 교묘하게 분배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대영주가 등장할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윌리엄은 사냥을 너무나 좋아했기에 많은 숲을 왕유림(왕 전용의 사냥터)로 만들었는데, 왕유림이 가장 넓을 땐 잉글랜드 전체의 1/3이나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 폐단이 심각하였다. 왕유림 제도는 허가없이 사냥 한 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처벌을 가함으로서, 매우 악명높은 제도로 오랜시간 남아있게 된다. (참고로, 로빈훗 설화에서 로빈훗이 쫓기는 이유가 왕유림에서 사슴을 잡은 것 때문)
정복왕 윌리엄은 21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였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는데, 그가 타고 있는 말이 실족하면서 안장 앞머리에 몸을 부딪혀 심각한 내상을 입고만 것이다. 결국, 회복되지 못한 그는 세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는데, 장남인 로버트에겐 노르망디를, 차남인 루퍼스에겐 잉글랜드를, 막내인 헨리에겐 영지를 살 수 있는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윌리엄은 캉의 성 스테판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매장 후 사체가 부어올라 관이 터졌다고 한다. 이에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생전에 황금과 보석으로 휘감았던 사람이 이제는 부패물에 불과했다."
윌리엄은 기사도와 매우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유능한 통치자였고, 잉글랜드에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노르만 왕조의 통치 시기에 색슨 문화와 노르만 문화가 섞여 독특한 잉글랜드 문화를 형성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노르만 왕조의 지배하에서 노르만인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 노르만족과 색슨족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플랜더즈의 마틸다
플랜더즈 백작 볼드윈의 딸.
윌리엄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으나 가까운 친족이었기 때문에 교황이 결혼을 금지하였다. 윌리엄은 이를 무시하고 결혼을 강행했는데, 이 때문에 교황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잉글랜드 정벌을 위해서 교황의 도움이 절실했던 윌리엄은, 캉에 호화로운 대성당 세 개을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교황과 화해하였고, 이후 교황권의 강화와 잉글랜드 정벌이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교황은 윌리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마틸다는 슬하에 로버트, 루퍼스, 헨리의 세 아들을 두었으며 윌리엄보다 일찍 죽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부부관계는 좋았는 듯 하다.
그리드형(광고전용)
'[토탈워 : 미디블 2] > [역사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물] 잉글랜드 정복왕의 세 왕자 (2) | 2008.10.05 |
---|---|
[인물] 비잔티움 공주 안나 콤네나 (0) | 2008.10.05 |
[인물]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2세 (0) | 2008.10.04 |
[인물]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 (6) | 2008.10.04 |
댓글